한국어

자료실

<자료실>

이 세상에 훌륭한 그림언어를 사용한 설교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탁월하게 그림언어를 사용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에는 그림언어가 넘쳐난다. 특별히 자연에서 온 그림언어들을 즐겨 사용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소금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셨다(5:13-16). 제자들이 먹고 입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도록 공중의 새들의 백화합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6:26-28). 형제를 비판하지 않도록 교훈하기 위해서 눈 속의 들보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셨고(7:1-5), 진리를 아무에게나 던지지 않도록 ,’ ‘진주,’ ‘돼지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7:6).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해서 아들,’ ‘,’ ‘,’ ‘생선,’ ‘이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고(7:9-10),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설명하기 위해서 좁은 문넓은 문이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7:13-14).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양의 옷,’ ‘이리,’ ‘열매,’ ‘가시나무,’ ‘포도,’ ‘엉겅퀴,’ ‘무화과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교훈하셨다(7:15-17).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는 구분하기 위해서 반석위에 지은 집모래위에 지은 집이라는 그림언어로 설명하셨다(7:24-27).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그림언어들만 보더라도 얼마나 그가 다양한 그림언어를 구사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가르칠 때에도 수많은 그림언어들을 비유의 형식으로 사용하셨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비유들은 그림언어로 되어 있다. ‘씨 뿌리는 비유에 등장하는 그림언어들을 보라.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밭, , , , , 가시떨기, 결실, 귀 등의 그림언어가 포함되어 있다. ‘가라지 비유,’ ‘겨자씨와 누룩 비유,’ ‘감추인 보화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 ‘그물 비유등은 모두 그림언어에 기초한 비유들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 나라 비유도 모두 그림언어들로 구성된 비유들이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도 또한 생생한 그림언어를 통해서 다가올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스토리텔링 기법이라는 탁월한 그림언어를 사용한 설교자이셨다. 그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청중은 갈등과 절정과 해결의 과정을 통해 서스펜스와 감동을 느끼게 된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서 주신 비유인데, 진정한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스토리를 통해 깨닫게 한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씩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하는 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울러 용서하지 않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가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신다. 위에서 말한 스토리의 플롯에 따라 이 비유를 분석해보자.

 

(서론적 설명)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갈등)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해결)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결론)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23-35).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은혜를 모르는 무지비한 종이라는 그림언어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임금, 일만 달란트 빚진 종,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다른 동료들이다. 임금이란 인물을 통해서 전달하는 그림언어는 종의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탕감해줄 정도로 은혜가 많은 모습이지만, 정의에 어긋난 무자비한 행동을 보일 때는 종에게 엄한 심판을 내리는 정의로운 임금의 모습이다.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이는 그림언어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도저히 자신의 노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불쌍한 종인데, 임금님께 큰 은혜를 받고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은 행운아이다. 이는 곧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타고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용서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그림언어이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자신이 그렇게도 많은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까마득히 잊고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동료의 멱살을 잡는 그의 모습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의 동료도 자신처럼 참아주면 갚겠다고 했지만 그를 옥에 집어넣는 모습이 잔인하기까지 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엄청난 죄를 용서받고도 그 은혜를 잊고 형제가 자신에게 범한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무자비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백 데나리온의 빚이 대조를 이루는데, 후자는 전자의 60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작은 액수이다. 이 그림언어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용서받은 죄의 크기와 형제의 잘못을 극적으로 대조키시고 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빚을 갚도록 동료를 옥에 집어넣는 모습은 형제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잔인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비유의 핵심이다. 먼저 동료들이 이런 부정의한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금님께 이 소식을 전한다. 임금님이 은혜를 모르는 무자비한 종을 다시 불러 그에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꾸짖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것처럼 형제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이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임금님이 무자비한 종에게 부과한 벌은 자신이 그의 동료에게 부과한 벌과 동일한 벌이다. 이는 곧 형제에 대한 진정한 용서가 없으면 자신의 죄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 투옥의 이미지는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그림언어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신의 죄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반드시 형제를 용서하라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시옵고”(“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RSV; 6:12)라고 기도하도록 주님은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에도 마태복음 18장에서처럼 죄를 가리켜 동일한 이라는 그림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결론에 이 비유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대구법 형식으로 요약되어 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형제를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그림언어를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계시는가?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서 발췌)

(c) 2015 Jinkyu Kim, Institute for Biblical Interpretation & Preaching, 성경해석과 설교 연구소;

Phone: 041-550-2078; email: pjkk919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