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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그림언어

2015.02.0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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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많은 진리는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의 빛”(8;12), “생명의 떡”(6:48), “포도나무”(15:1), “성전”(2:19), “부활”(11:25), “생명”(11:25), “”(14:6), “진리”(14:6) 등의 은유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많은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은유들을 함께 보자.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3:8).

 

여기서 이스라엘이 행한 간음은 육욕적인 간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가 간음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말이 안 된다. 여기에 사용된 간음은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쫓고 그에게 준 이혼서는 문자적인 이혼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간음한 아내로 여기고 이혼을 선포했다는 은유적 의미의 이혼서이다. 또 국가인 유다가 어떻게 국가인 이스라엘의 자매가 될 수 있는가? 이는 문자적인 뜻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와의 관계를 자매 관계로 묘사하기 위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다의 행음도 문자적인 행음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3:14-15).

 

여기에 사용된 배역한 자식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어서 따라오는 말씀에는 갑자기 은유가 바뀐다.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나는 너희 남편이라고 칭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남편이시면, 이스라엘은 아내라는 은유를 전제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은유가 자식에게서 아내로 갑자기 전환된 경우이다. 이런 전환된 은유를 염두에 두고 나는 너희 남편이라고 칭하고 있다. 남편이란 말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식의 은유와 아내의 은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은유 사이에 끼인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권유에는 하나님의 눈물이 담긴 간절한 호소가 내포되어있다. 사랑하는 자식이 탈선하여 배역한 자식되어버린 그를 향하여 애절히 호소하는 애끓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 은유 속에 담겨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외간남자와 바람이나 음탕한 음녀로 전락해버린 그를 향해 애끓는 심정으로 돌아오라고 남편인 하나님은 호소하고 있다. 자식, 아내, 남편의 이미지들은 사랑과 애정으로 얽힌 우리의 가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란 말속에 나오는 목자들은 단순히 양치는 목자가 아니라, 왕들을 가리키는 은유들이다. 고대근동에는 왕을 가리켜 목자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5:14).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멸당할 것을 불로 나무를 태우는 그림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불이 될 수 있는가? 문자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는 은유적 표현이다. 백성이 어떻게 나무가 될 수 있는가? 이도 문자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도 역시 은유적 표현이다. 무엇을 위한 은유인가? 불로 나무를 태우는 이미지를 위해서 사용한 은유법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 되고, 백성들은 나무가 되어서, 불로 나무를 사르듯이 태우시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불사르리라는 말도 역시 은유적 표현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 방법은 불로 태운 것이 아니라, 주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통해 멸망당하게 하셨다(14:12; 21:9). 그러므로 불사르리라는 말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9:1).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애끓는 심정을 삼중 은유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결코 머리가 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선지자는 자신의 머리가 물이 되는 은유를 사용한다. 눈물은 눈물주머니에 찬 것만큼 나오게 된다. 눈물주머니는 머리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불과하다. 그런데 머리 전체가 물이 된다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양의 눈물을 쏟기를 바라는 선지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선지자는 자신의 눈을 위해서 눈물 근원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 근원의 뜻은 쉽게 말하면 ”(, 마코르)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을 눈물이 흘러내리는 샘에 비유하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단순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눈의 본래 기능을 넘어 마치 샘물에서 물이 솟듯이 눈물을 쏟아내는 그런 눈물 샘이란 의미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도 역시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리하여 머리 전체가 물이 되고 눈은 눈물의 샘이 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길 원하는 선지자의 애틋한 마음이 녹아있다. 선지자 자신의 백성인 유다를 향하여 죽임을 당한 딸이라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예레미야는 딸 잃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들을 위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길 바란다. 얼마나 선지자가 민족을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는 그림언어들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넘어질 때, 목회자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 것인가를 선지자를 통해서 배우길 바란다. 무조건 책망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예레미야의 심정을 갖고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애틋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참 목자가 되어야 하리라.


("히브리 시인에게 설교를 배우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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