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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언론보도>

오순절파의 영향으로 요즈음 '기복신앙'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많다. 소위 삼박자 축복을 강조하는데, 결국 현세적 복을 너무 추구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강단에서 복에 대한 설교만 해도 닭살이 돋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복에 대한 설교가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한다. 이런 우려들로 성경에 나오는 복을 설교하는 것조차 힘든 시대가 되었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는 공공연하게 신학자들이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해서 복에 대해 설교도 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용어 사용에 대해서 좀 재고하자는 차원에서이다. 한국에서만 '기복'(祈福)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 미국에서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복을 비는 것'(祈福)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예를 들면 'blessing' 자체를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나온 글들은 대부분 prosperity theology/gospel(번영신학/복음)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현재 샤머니즘 신앙에 사용되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에서 차용해서 '복을 비는 것'(祈福)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타당한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복신앙'이 주로 한국의 샤머니즘에 사용된 용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예를 들면 '재수굿'에는 주로 현세적 금전과 건강과 장수의 복을 비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재수굿에는 영적인 복에 대한 개념이 없다. 샤머니즘에서는 복을 비는 대상이 귀신들이나 조상신이다. 그리고 복의 내용도 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샤머니즘은 신앙에 따른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는 민속신앙의 형태이다.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규정하는 경전 자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김성례, "기복신앙의 윤리와 자본주의 문화," <종교 연구> 27 (2002): 61~86).

이런 샤머니즘 용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쓸 수 있겠는가? 주로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 샤머니즘에서 복을 구하듯이 금전, 건강, 장수의 복을 주로 추구하는 신앙 집단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먼저 현세적인 복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경은 현세적인 복을 무시하고 있는가?

우리가 먼저 성경이 금전이나 건강이나 장수의 복을 구하는 것 자체를 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것 자체를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복들은 대부분 현세적인 복들이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4-6)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면서 구한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였다. 야곱은 이날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매달려 기도한 것이다. 그가 기도한 내용은 무엇일까? 내일이면 대면하게 될 형 에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분명하다. 즉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런 기도가 잘못된 것인가? 이런 기도가 기복신앙일까?

한나가 그렇게 오랫동안 술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 무엇인가?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닌가? 불임 여인이 자식을 구하는 기도가 기복신앙인가?

신약으로 넘어와서 야고보 사도는 병든 자의 강건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4)

이어서 16절에는 "병이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야고보는 명하고 있다. 야고보가 명한 건강을 위한 기도가 기복적인 것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 제목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이다. 예수님이 당시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를 가르친 것이 기복적인가? 어떤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영적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는 '명백한 의미'를 무시하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에 '일용할 양식'은 꼭 음식만을 위한 기도이겠는가? 이는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복의 개념이 구약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복에 대한 강조로 넘어간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에 나오는 8복은 모두 영적인 복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린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등으로 모두 영적인 복을 강조한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현세적인 복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몇몇 말씀만 보면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30)

여기에 특이한 점은 주님께서 현세적인 복과 내세의 복을 분명히 구분해서 2가지 모두를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Craig A. Evans, <Mark 8:27-16:20(WBC 34B)>, 102~103).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을 대속적인 가난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여기서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은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영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결코 영적으로 가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정말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는 공생애 중에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부요함에서 가난함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는 '대속적 가난'을 말씀하고 있다(Ralph P. Martin, <2 Corinthians (WBC 40)>, 262~264).

이런 말씀들을 보면 신약성경은 영적인 복을 강조하지만 현세적 복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이 물질적인 것을 천하게 여겼다. 그래서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했다. 당시의 스토아철학이나 영지주의 이단은 물질세계를 천하게 여겼지만 신약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은 성도의 몸을 '성령의 전'(고전 6:19)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조건

그렇다면 구약에서는 오직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축복의 장이라고 여기는 신명기 28장에서조차도 현세적인 복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영적인 복이 우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신명기 28장 1-2절을 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신 28:1-2)

하나님은 먼저 복의 조건을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신명기 28장의 복은 한국의 샤머니즘처럼 손발이 닳도록 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곧 영적인 복 중에 복이다.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물질적인 복은 따라 온다는 뜻이다. 구약의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항상 전제된 것이다. 이는 도덕성과 윤리성이 전제된 복이다.

요컨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건강, 장수, 재물에 대한 복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먼저 우선되는 것은 영적인 복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이 기본적인 공식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 특정한 신앙 집단을 가리켜 기복신앙이라고 비난하는가? 그 이유는 영적인 것에 우선을 두지 않고 너무 현세적인 복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성경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핵심 메시지인 십자가를 지는 삶이나 고난에 대한 강조점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오직 물질적인 복과 성공과 건강과 장수를 주신다고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때로는 고난이 우리의 복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했다(요 12:23). 그리스도를 본받는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두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부'가 한편으로 복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주라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친다. 특히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가르치셨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오직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고 축복만 따르게 되고,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복에 대한 편향된 가르침, 어떻게 분별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편향된 가르침을 가리켜 샤머니즘에서 사용하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될까? 여기에 의문을 갖는다. 샤머니즘은 앞에서 본 대로 3가지 차원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1. 신앙의 대상이 다르다. 샤머니즘은 귀신과 조상신에게 주로 빈다.
2. 복의 내용은 오직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3.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같은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이 무조건 복만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이런 세속화된 복만을 추구하는가 의문을 갖는다.

1. 이들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다.
2. 복의 내용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일 수 있으나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는가?
3. 도덕성이나 윤리성이 없이 오직 복만을 추구하는가?

2번 항목의 테스트를 위해서 삼박자 축복에서 강조하는 요한삼서 2절을 보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2)

이 말씀대로만 기도한다면 먼저 영혼의 잘됨이 우선이다. 그리고 범사의 잘됨과 강건함이다. 범사의 잘됨과 강건함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 먼저 영혼의 잘됨이 우선인가가 중요하다. 적어도 이 구절을 올바로만 사용한다면 2번 항목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면 3번 항목은 어떤가? 이는 말씀의 원리를 아는 목회자라면 신앙에 있어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배제하고 말씀을 가르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삶의 결과를 두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삶의 결과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물질적인 복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도덕성이나 윤리성을 완전히 뭉개 버린 철면피가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샤머니즘에서 쓰는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사용할 때는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복에 대한 설교 자체에 대해서 닭살 돋을 필요가 없다. 성경 자체가 복을 구하는 내용으로 가득하고, 복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하면, '복'이라고 하면 무조건 현세적인 복만 생각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현세적인 복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영적인 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메시지도 '복음'(복된 소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복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한 바른 지도 필요해

그렇다면 요즈음 소위 현세적인 복에 강조점을 두고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는 집단에게 적절한 용어는 무엇일까? 바로 '번영신학' 혹은 '번영복음'이다. 이는 미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비판해 온 잘못된 신앙관을 가리킨다.

번영신앙은 예수 믿으면 반드시 잘살게 되고, 건강하게 되고, 장수하게 되고, 잘된다는 번영만을 외치는 신앙의 형태이다. 한국 땅에 나타난 이런 유형의 신앙도 '번영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이미 약 20년 전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공동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사용된 용어가 '번영신학'이었다. 그때 발표된 논문들에서 '기복신앙'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다.

한자어로 '기복'(祈福)이는 말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적극 권장해야 할 일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비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적 축복의 권리(민 6:24-26)를 행사하는 행위이다. 단지 바른 방향으로 지도해 줄 필요가 있다.

1.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하고.
2.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구하도록 지도해야 하고.
3.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같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복의 기초가 됨을 가르쳐야 한다.

  
▲ 김진규 교수(백석대 구약학).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대상(우상들)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고,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즉 도덕성과 윤리성이 문제였다. 이것이 전제된다면 복을 구하는 것은 성도가 가질 당연한 특권이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복중에 최고의 복인 복음의 축복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복이다.

그러나 때로 '고난'도 복에 포함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는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이들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더욱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복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복'을 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복이 어떤 복이냐가 더욱 중요하고 어떤 대상에게 구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무엇보다 그 복에 합당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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