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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2015.02.05 11:03

운영자 조회 수:1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7-11).

 

내가 강도사 시절 캘리포니아에서 사역할 때 일이다. 어느 권사님이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죠?” 사실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가나안 칠 족속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라고 명하신 무서운 하나님처럼 보인다. 반면에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처럼 보인다. 외관상 그렇게 보이지만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이런 견해가 바로 초대교회 당시에 영지주의 이단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다. 본문이 나오는 요한일서에 이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42-3절에 보면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던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 이단이다.

이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구약성경을 성경에서 제외시켜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쪽 면만을 알고 다른 면을 모르는 이단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모르기 때문에 빠진 이단이다. 요즈음 강단에서도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하면 얼굴이 밝아지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 하면 금방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면을 모두 가르친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 칠 족속을 멸절시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신약시대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무조건 사랑 만하시는 그냥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처럼 오해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도 수없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계시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34:6).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 은혜, 인자, 진실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칠 족속은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명하셨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자비의 성품과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잔인하게 유아까지 멸절시키라고 명하셨는가? 그 이유는 이것이다. 이들을 살려두면 이스라엘 공동체를 함께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을 살려두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멸절키시라고 명하신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들을 살려둠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이들처럼 망하게 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신약의 하나님은 어떤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의 외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을 듣고 이들을 즉시 데려가셨는가? 베드로를 속이고 교회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자, 하나님은 교회를 거짓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데려가셨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그렇게 이들 부부를 데려가셨는가? 그들은 교인들이었고, 재산을 다 팔만큼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에 욕심이 들어 재산의 일부를 숨기고 성령을 속였는데, 이렇게 죽이시기까지 하셨을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가 그냥 쉽게 생각하면 뭐든지 덮어주시는 그저 좋기만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헤매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좋은 분인데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을까?”라고 원망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거룩한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이 반드시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가 들어있고,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룩이 들어있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더욱 깊이 깨닫길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몇 가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나누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여기에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는 말씀의 뜻은 이렇다. 영어성경 NIV에 보면 화목제란 말을 속죄를 위한 제물’(atoning sacrific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사랑과도 다른 사랑이다. 하나님께 반란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외아들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이다. 그래서 로마서 5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세상에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다. 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상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도 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당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개죽음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지고한 아가페의 사랑이다.

 

몇 년 전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배우인 멜 깁슨이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이라는 영화가 나와 많은 성도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만을 다룬 영화이다. 멜 깁슨은 2004년도 야심차게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실패할 것이라며 투자하기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수난만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없었고 벤허십계이후 흥행에 성공한 기독교 영화가 없다. 멜 깁슨은 그의 재산 전부를 투자해서 영화를 제작했다. 할리우드에서는 공공연하게 이제 멜 깁슨은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영화를 개봉하는 첫날, 멜 깁슨은 투자한 돈을 모두 벌어들였다. 사람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영화관은 부흥회의 장소가 되었다. 영화를 보고 강도가 자수를 하고, 가출한 자녀들이 가정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눈물을 적시며,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은혜를 누렸다. 이슬람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상영을 했다. 그런데 예상의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많은 회교도(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틀 만에 영화 상영을 중단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본 유대인들이 멜 깁슨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우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생각하시오?” 멜 깁슨의 대답은 명확했다. “아니요, 나는 예전에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영화는 나를 사랑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멜 깁슨이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를 만든 것은 유대인을 미워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오해했지만 그가 영화를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알콜 중독자였던 자신을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그리기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만든 신앙고백적인 영화였다.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다. 멜 깁슨은 이 사랑에 감동해서 전 재산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의 마음이 메말라 갈 때마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기억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2.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각별한 예정과 선택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10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아시고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요한일서 31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에베소서 24-5절에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우리는 영적으로 죽음가운데서 살아났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과 함께 천상에 들림 받아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서 영적인 권세를 갖고 다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죄악의 종노릇, 마귀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함께 앉히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우리인가?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을 믿는 나는 사랑받은 사람이다. 부모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사랑받은 사람이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아내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사랑받은 사람이다. 교인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이미 하나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이웃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사람이다. 누가 사랑해요?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쓰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7).

하나님께서 당신의 귀에 대고 난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선택했단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안 들리는가?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너를 불렀고, 너에게 영생을 주었고, 내 아들과 함께 천국에 앉혔단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에게 신비한 소리로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에게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해서 너를 선택 했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세상에서 선생님이 나를 사랑해줘도 힘이 난다. 회사의 사장이 특별히 사랑해줘도 힘이 난다. 국가의 대통령이 특별히 사랑해 준다면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하물며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랑의 감격 속에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다. 할렐루야!

 

3. 그래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천상천하에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곤고, 박해, 기근, 적신(벌거벗음), 위험, 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특히 37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사랑 때문에 종일 도살할 양같이 취급을 당하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이 큰 사랑 때문에 순교한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주님을 부인할 수가 없어서 순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은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 폴리갑은 노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폴리갑을 처형하는 총독은 그의 노령을 고려해서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했다. 그는 폴리갑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황제에게 충성 맹세하면 당장 살려주겠다.” 이 말을 듣고 폴리갑은 대답하기를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어떻게 그를 모른다고 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소. 총독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화형을 당했다. 폴리갑은 타는 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 저 같은 것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시켜 주시는 이 날을 감사 찬송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순교했다고 한다. 폴리갑은 진정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뜨거운 불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권고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여기에 마땅하도다라는 말의 원문(오페일로멘)의 뜻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자매를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작가이자 세계적인 소설가인 톨스토이가 경험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한 번은 그가 여행을 하던 중

한 주막에 들러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주막집을 나오려 할 때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그 주막집의 어린 딸이 병들어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톨스토이의 빨간 가방을 보고서는

자기 어머니에게 그것을 달라고 조르며

울고 있는 것을 톨스토이가 알게 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그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자신이 지금 여행중이고 그 가방 안에는

여러 짐들이 있었기에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얘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마.

그때는 내가 너에게 이 가방을 주도록 하마."

 

그리고 난 뒤 톨스토이는 별 생각없이

그 주막집을 나왔다.

며칠 후 그는 약속대로

다시 그 가방을 들고 주막집을 찾아갔다.

 

그는 병들어 누워 있던 아이에게

자신의 빨간 가방을 주기 위해서 그 아이를 찾았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손님이 가신 그날 저녁에

결국은 죽고 말았답니다.

손님의 빨간 가방을 그토록 갖고 싶어하더니

며칠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가버리고 말았답니다."

 

톨스토이는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그 아이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는 자기가 가져온 빨간 가방을 무덤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면서

그 아이의 무덤 앞에 하나의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는 그 비석에 이러한 글귀를 새겨 넣었다.

"사랑은 연기하지 말라!"

톨스토이의 아픈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비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사랑을 연기하지 마시라. 때 늦기 전에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우리가 되자. 하늘로부터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기 전에 서로 사랑하자. 주님이 흰 구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 전에 서로 사랑하자.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의 표지이다.(13:35).

(c) 2015 Jinkyu Kim, Institute for Biblical Interpretation & Preaching, 성경해석과 설교 연구소;

Phone: 041-550-2078; email: pjkk919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