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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6-17).

 

비신자 일 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 내용은 당신의 삶에 일생일대의 큰 위기가 온다면 어디에 찾아가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들 중에 90% 이상의 사람들이 점, 사주, 팔자, 관상 보는 사람에게 찾아가겠다고 했고, 5%만이 교회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뭘 의미하는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은 인생문제 해결에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종교로 비친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똑같이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로 비친 모습이다.[1]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기독교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기독교를 이렇게 무능력한 종교로 보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주된 이유는 지금까지 복음을 너무 축소해서 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복음을 주로 영혼 구원에만 제한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지 않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불신자들에게는 영혼에 대한 관심이나, 천국, 지옥, 내세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전하면, 많은 불신자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복음을 주로 영혼 구원으로만 축소해서 전한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나 자신도 똑같은 오류에 빠진 적이 많았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주로 전했다. 여기서 구원받는다는 말은 주로 영혼구원에 제한된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오류를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복음의 총체적인 능력을 축소해서 일부만 전했으니 복음을 편협하게 제한한 축소주의 오류요, 환원주의 오류인 것이다. 복음을 영혼구원에만 축소해서 전하는 것, 인격 수양의 수단으로만 전하는 것, 사회정의 실현의 수단으로만 전하는 것, 복 받는 도구로만 여기는 기복주의 신앙은 모두 복음을 축소해서 전하는 것이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환원주의 오류에 빠져 복음의 총체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눈이 빠지고 능력을 잃어버린 삼손과 같은 복음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설문조사를 통해서 반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인들은 많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우울증, 불면증, 술 중독, 도박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 각종 육신의 질병, 각종 성격 장애 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복음이 해결할 수 없는가? 예수 믿으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가? 성경은 해결된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정말 예수 믿고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쟁이나 사주, 팔자, 관상 보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교회를 찾아오지 않겠는가? 사실 이런 복음의 능력을 일상적으로 체험해야 정상적인 성도의 삶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에 사도 바울이 들어간 후에 모든 무속신앙은 끝장나고 말았다. 당시에 에베소에 그렇게도 인기 있던 마술 사업은 끝장이 났다. 복음의 능력에 압도되어 은 5만이나 되는 마술책을 불 태워버렸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시몬과 같은 뛰어난 마술사도 복음의 능력에 매료되어 마술을 버리고 빌립을 열광적으로 쫓을 정도였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나타났는가? 오늘날 바울과 빌립이 나타난다면 무속신앙들은 끝장이 나지 않겠는가?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이 들어가면, 당시에 모든 주술들은 다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날 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는 나 자신의 심각한 고민이기도 하다. 왜 선거철만 되면 대한민국 땅에 무속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가?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 자신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복음의 총체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죄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질병들과 마음의 문제도 해결되어야 정상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 안에서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면 해결이 된다.

 

복음의 능력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이 겪고 있는 각종 문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어떻게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는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에덴동산에서 인간 타락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 타락은 인간의 모든 문제의 주범이다. 반면에 복음은 인간의 타락으로 생겨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먼저 인간의 타락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알고 나서, 이어서 복음이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보겠다.

 

인간 타락으로 인해 생긴 인간의 문제점들은 무엇인가?

 

첫째, 영적인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찾아온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었다. 영적인 죽음과 동시에 육신적인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육신적인 죽음은 오랜 세월 후에 찾아왔지만, 영적인 죽음은 곧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영적인 죽음이란 뭘 말하는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표현한다. 반면에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 즉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2]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타락 전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14:17).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로 인하여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사라져버렸다. 영적인 사망은 곧 인간에게 의와 희락과 평강의 상실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 또 영적 사망은 곧 인간의 육체로 하여금 서서히 병들고 노쇠하게 만들어 마침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모든 결과는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 즉 영적인 사망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이다. 사실 영적인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의 뿌리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로 인하여 정신적인 문제육체적인 문제도 따라오게 되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찾아온 최대의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결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놓았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2-3). 인간의 추악한 모습, 인간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 원인이 있다.

 

둘째,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제가 생겼다.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인간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창세기 3장 이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타락 한 직후에 인간에는 생긴 첫 번째 심리적인 문제는 두려움이었다(3:10). 인간의 염려와 근심과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생긴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부부는 서로 탓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책임 추궁하시자 하와가 꾀어서 먹었다고 아내 탓을 한다(3:12). 하와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책임 추궁하자, 하와는 뱀이 꾀어서 선악과를 먹었다고 뱀 탓을 한다(3:13). 인간의 죄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는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지지 않고 배우자나 부모나 자식이나 이웃이나 사회나 주위 환경을 탓하는 버릇이다. 이 버릇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성경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온 것이라고.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지만 모든 문제가 환경의 산물은 아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어릴 적 환경은 결코 좋지 않았지만 이들은 미국의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라갔고, 아브라함은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 되었다. 요즈음 심리학에서 인간의 병리적 현상을 주로 환경 탓으로만 주로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주장하듯이 인간은 기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산물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로 조물주께서 창조하셨다. 나의 요지는 이것이다. 죄에 대한 책임을 환경 탓으로만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에서 온 죄악 된 근성이다. 탓하면 회개의 여지가 없다. 주님의 은혜는 내가 죄인입니다. 이 죽을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태도에서 임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생긴 또 하나의 심리적 병리현상은 시기심과 질투심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이로 인하여 가인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발동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낯빛이 변했고 마침내 동생을 죽이게 된다(4:3-8).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점점 내리막을 치닫게 되는데, 가인의 6대손 라멕이라는 자는 자신의 몸에 상처만 주어도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잔인한 인간이 되었다(4:23). 그는 가인보다 10배 이상으로 보복하는 살기가 충천한 사람이 되었다(4:24).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시기, 질투, 살인, 미움, 증오심이 들끓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노아 홍수 직전의 인간의 상태는 인간의 마음의 전적인 부패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6:5)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결과는 홍수로 인간을 심판하시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현대인들의 심리적인 고통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울증, 불면증, 불안, 근심, 도박중독, 술 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 시기심, 질투심, 미움, 증오, 살인은 그 뿌리가 인간 타락에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치유되지 않으면 인간의 이런 문제는 고쳐지지 않는다.

 

셋째, 인간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적인 문제가 생겼다.

인간에게 육신적인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왔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으로 치를 떨어야 했고,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지배를 받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해야 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평생토록 맞고 살았다. 그날도 할아버지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고 열이 받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때려죽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기소되었지만 무죄 석방되었다고 한다. 판사는 일생 동안 남편의 구타로 고통 당한 정상을 참작하여 무죄선고를 했다고 한다. 왜 사랑하는 부부간에 이런 고통이 따르게 되었는가? 성경은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또 땅이 엉겅퀴와 가시들을 내므로 인하여 남자는 땅을 경작할 때 육체적 고통이 따랐다. 일평생 땀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모든 인간은 각종 질병으로 고통 당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질병이 없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부터 인간에게 질병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이 모든 인생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 타락의 결과 죄는 인간의 총체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영적 죽음의 결과 만들어진 산물들이다. 인간의 영적, 정신적, 육신적 문제 등 인간의 총체적인 문제는 인간 타락에서 생겨난 문제들이다. 인간 타락의 결과 두려움이란 심리적인 문제, 부부 문제, 자녀 문제, 일부다처제의 구조악의 문제, 마음의 전적인 부패,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 사회가 되었다. 결국 인간은 고통과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여지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인간 타락의 심각한 문제를 뛰어넘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타락으로 만들어진 모든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총체적인 구원이다. 아니 그 이상을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총체적인 문제까지 해결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약속하신 복음은 영혼 문제만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신적 문제까지 다 해결했다. 복음은 인생의 영적, 정신적, 육신적 문제 모두를 해결했다. 나아가 타락으로 인하여 구겨진 피조물의 총체적인 회복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19-2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도 함께 탄식하는 소리, 함께 고통 당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동물세계에서 약육강식의 원리가 언제부터 지배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타락이후부터이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강물을 먹고 있던 사슴이 물속의 악어에게 물려 발버둥을 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아프리카 얼룩말이 사자 떼의 공격을 받아 처참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늙은 사자가 하이나 떼의 습격을 받아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피조 세계의 이런 죽고 죽이는 처참한 고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생긴 타락의 쓴 열매들이다. 그래서 피조물들도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다.[3]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6-9).

 

주님께서 오셔서 만물을 회복시키는 그때가 되면 구원받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피조물들의 고통도 함께 끝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마지막으로 멸망당 할 원수는 사망이라는 그 자체이다(고전 15:26). 죽음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곳, 오직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이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에 생긴 총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대해 복음은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 구약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능력을 가장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이사야 53장이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은 성경을 조금 아는 사람들이 읽으면 이 본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이사야 53장과 관련해서 지금도 잊지 못할 한 만남이 나에게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유학공부를 하던 중에 어느 날 유대인 선교사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도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선교를 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몹시 궁금했다. 유대인이 예수 믿기가 힘들고, 또 유대인들에게 선교한다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매주일 정해놓은 분량의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 성경을 순서대로 읽어가다가 이사야 53장을 읽을 차례가 되면 이상하게 회당에서 이사야 53장은 읽지 않고 건너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분이 너무나 궁금해서 조용한 곳에서 이사야 53장을 읽어보았다고 한다. 그가 이사야 53장을 읽자마자, 여기에 예언하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즉각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자 가정에서는 호적에서 말소시키고 그를 쫓아내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유대인 선교사의 경험처럼,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가장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는 본문이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예언한 말씀이다.[4] 메시아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얼마나 처절한 고난을 당하시게 될 것인가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당시 십자가 사형제도가 없었던 시기에 어쩌면 이렇게도 십자가의 고난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까 감탄을 하게 된다. 정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임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메시아의 찔림과 상함과 징계 받으심과 채찍 맞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허물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우리의 모든 질병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예언하고 있다(4-6). 무엇보다 가장 자주 반복되는 주제는 메시아의 고난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기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었다는 사실이다(5, 6, 8, 10, 11, 12).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죄 문제의 해결이 이사야 53장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타락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 문제임이 드러났다. 바로 이 죄 문제를 이사야 53장을 해결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어떻게 죄 문제가 해결되는가? 메시아의 처절한 고난을 통해서이다.

 

1990년대 말에 리 스트로벨이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한 판례(The Case for Christ; 한국어판은 예수는 역사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됨)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리 스트로벨은 본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예일대 법학전문대학원 출신으로 시카고 크리뷴 지의 법률 담당 기자였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인 무신론자였는데, 아내를 따라 윌로우크릭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그는 언론인답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13명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서 설명을 듣고 반대 탐문을 통해서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그의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만난 사람은 알렉산더 메드럴 박사였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의학적 자료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의사이다. 그는 캘리포니아대학 연구과학자로 가르치기도 했다. 리 스트로벨은 메드럴 박사와 만나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어떤 고통을 느꼈으며,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고통이며, 예수님의 죽게 된 사망 원인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스트로벨: 태형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메드럴: 로마의 태형은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형벌로 알려져 있죠.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기분에 따라 그보다 훨씬 더 가닥수가 많을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 책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쇠 구슬이 박혀 있었습니다. 채찍으로 몸을 때리면 구슬들 때문에 깊은 상처나 멍이 생겼고, 채찍질을 계속하면 상처 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져 나갔습니다. 특히 등이 심하게 찢겨져 나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했습니다. 채찍질은 어깨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등과 엉덩이 그리고 정강이까지 계속됩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로마의 태형을 연구했던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의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빠지고...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서 액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목이 마르게 됩니다.

스트로벨: 십자가 처형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메드럴: 그분은 눕혀진 후에 십자가의 가로 들보 위로 팔을 뻗친 상태에서 못 박혔습니다. 이 가로 들보(cross bar)는 패티블룸(patibulum)이라고 불렸는데, 십자가의 수직 기둥과는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직 기둥은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스트로벨: 못은 어떤 종류입니까? 그리고 신체의 어느 부분에 못을 박았습니까?

메드럴: 로마 군인이 5-7인치(13-18센티) 정도 되는, 끝이 가늘고 뾰족한 대못을 사용해서 손목에 박았습니다. 성화를 보면 전부 손바닥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손목에 못이 박혔습니다. 손목에 못을 박아야 손이 단단하게 고정됩니다. 만약 손바닥에 못이 박히면, 몸무게 때문에 손바닥이 찢겨져 나가서 십자가에서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손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언어는 손바닥과 손목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중추 신경이 지나가는 위치에 못이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 신경은 손으로 나가는 가장 큰 신경인데, 못이 그 곳을 내리칠 경우 완전히 파괴됩니다.

스트로벨: 못이 손목에 박힐 경우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됩니까?

메드럴: 이런 식으로 한번 설명해 보죠. 팔꿈치를 세게 부딪칠 때 혹은 척골 끝(팔굽에 있고 때리면 짜릿한 느낌이 나는 뼈)을 때릴 경우에 느끼는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 신경은 일명 척골 신경이라고 불리는데, 부딪칠 경우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펜치로 그 신경을 잡고 비틀어서 뭉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느끼는 고통이 예수님께서 경험하셨던 고통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그 고통을 이겨내기란 불가능합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excruciating’(고문하는)이라는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은극심한 통증을 말할 때, ‘excruciating pain’이라고 표현합니다. 문자적으로 excruciating이란 말은 십자가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에 가로 들보를 들어 올려서 수직 기둥에 부착시켰습니다. 예수님도 끌어 올려 지셨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또 다시, 발에 있는 신경이 완전히 으깨졌고 손목에 못이 박혔을 때와 비슷한 고통을 느끼셨을 겁니다.

스트로벨: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예수님의 몸은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습니까?

메드럴: 무엇보다도 먼저, 팔이 늘어납니다. 아마 6인치 정도 늘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양쪽 어깨가 탈골 됩니다. 시편 22편이 예언하고 있듯이,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스트로벨: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 뭡니까?

메드럴: 일단 희생자가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게 되면 질식하면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됩니다. 질식하게 되는 이유는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경막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발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잠시 동안 이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발에 박혀 있는 못이 발을 점점 깊이 찌릅니다. 간신히 숨을 내쉰 후에는, 세웠던 발을 내리고서 잠시 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게 되죠. 그러면 또 다시 숨을 내쉬기 위해 발을 세워야 하고 동시에 십자가의 거친 나뭇결에 피 묻은 등이 긁히게 됩니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 결국 발을 세울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호흡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희생자는 소위 호흡산독증에 빠집니다. 호흡산독증이란 혈액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가 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뛰게 됩니다. 그리고서는 심장이 정지되면서 돌아가셨습니다.[6]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당하신 고통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나중에는 미쳐서 죽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도 몸서리치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는가? 이사야 53장은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답들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십자가의 능력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첫째, 영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5). 여기에 허물이라는 말의 원어(페솨)는 복수형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들 가리키는 단어이다.[7] 구약시대 710일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서받은 죄가 바로 페솨라는 죄였다. 이는 곧 인간이 범한 모든 죄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임을 의미한다(16:16, 21). 인간은 누구나 아담과 함께 하나님께 반역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려면 반드시 이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는 오직 여호와께서만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죄악이란 말의 원어(아본)도 복수형으로 하나님께 범한 모든 죄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8] 여기에 허물과 죄악이라는 두 단어가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모든 죄를 통칭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모두 지신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범한 근본적인 죄란 무엇인가? 6에 보면 그 죄가 어떤 죄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죄를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죄란 하나님의 뜻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죄이다.[9] 신자와 비신자를 판가름 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당신의 삶의 기준이 무엇이오?’라고 질문을 하면,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기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비신자는 나는 내가 좋은 대로 산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비신자는 자신의 삶의 기준을 따라 살면서 전혀 죄인 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점이다. 비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지만 조금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이요, 인간의 근본적인 죄의 모습이다

6절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가장 명백히 밝히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마음대로 살면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켰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죄악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것을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이란 말은 구약 제사제도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제사의 원리가 바로 대속의 원리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누군가 죄를 지으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제물(주로 양이나 염소 등)을 갖고 찾아온다. 그러면 죄인은 손을 제물 위에 올려 안수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지은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로 제물의 목을 찔러 피를 받는다.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른 후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제물을 잡아 각을 뜨고 불살라 드리는 의식이 따랐다.[10] 특히 제사의식 중에 죄인이 제물의 목에 칼을 찔러 죽어가는 제물로부터 피를 받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겠는가?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제물이 대신 죽는다는 사실을 통감했을 것이다. 이렇게 죄인을 대신해서 죽었던 제물을 대속물이라고 한다. 대속물이란 이 용어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대로 사용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구약시대에 죄인을 대신해서 죽었던 제물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이사야 53장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700여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적인 고난을 당하실 것을 거듭거듭 예언하고 있다(5, 6, 8, 10, 11,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실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8).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0).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11).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12).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렇게도 처절하게 고통 당하시면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다(5). 이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큰 은혜를 생각할 때, 찬송가 143장의 가사와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찬송 143)

1.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2.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4.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감격이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 속에 우리의 영적인 문제도, 마음의 문제도, 육신의 문제도 해결된다. 영적인 문제 해결이 다른 모든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유월절 사건은 십자가의 능력을 또 다른 각도로 예표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9가지 재앙을 내리셨지만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다. 마지막 10번째 애굽 땅에 내린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이었다. 애굽의 바로 왕의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짐승 새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땅의 모든 장자들을 다 죽이셨다. 이로 말미암아 바로 왕은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보냈다.

애굽 땅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도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혹은 염소)을 취하고 유월절 그날 밤에 양을 잡아 피를 집 문의 두 기둥과 머리 부분에 바른 후에 집안에 들어가서 양고기를 구워먹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면 죽음의 천사가 애굽 땅의 모든 집을 칠 때에피를 본즉 넘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 ‘유월(逾越節)이란 말이넘어간다(넘을 , 넘을 )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영어로Passover Festival’(문자적으로 넘어가는 절기)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살아서 애굽 땅을 나오게 되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상징한다.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난 것처럼,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1:29)이라고 했다. 이것이 십자가가 이룬 첫 번째 은혜이다. 우리가 죄 때문에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장자들이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렇게도 처절하게 고통 당하시면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다. 할렐루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여기에만 한정 시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제한된 견해 때문에 십자가의 충만한 능력을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로마서 6장은 이를 세례에 비유해서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세례는 주로 물속에 들어갔다고 나왔다고 한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로마서 6장은 바로 이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산 것이 아니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3-4).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2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처절하게 고난 당하신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이다.

둘째,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렇게 처절하게 못 박히셨듯이, 나의 옛 사람도 함께 못 박혀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로마서 6:6에 답이 나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뜻은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종은 어떤 사람인가? 종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죽으라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사람이다. 아니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죄에게 종 노릇 한다는 뜻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뜻이다. 죄가 거짓말 하라면 거짓말 하고, 죄가 미워하라면 미워하고, 죄가 더러운 짓 하라면 더러운 짓하고, 죄가 싸우라면 함께 싸우고, 죄가 화내라면 화내고, 죄가 교만 하라면 교만하고, 죄가 술 취하라면 술 취하고, 죄가 방탕하고, 당 짓고, 분열하고, 수군거리라면, 그대로 하는 자들죄의 종 노릇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죄에게 종 노릇 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자신이 죽지 않은 사람이다.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기 위해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난을 당하셨듯이, 나 자신의 옛사람도 처절한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자기죽음을 십자가의 고통에 비유한 것은 자신을 죽이기가 그렇게 힘들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애쓰는 삶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정말 성령님의 도우심이 이때 꼭 필요하다.

뉴욕에서 목회할 때, 어느 1.5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여름이면 교회 연합으로 중고등부 수련회를 했다. 그런데 한번은 연합수련회 중에 2세 전도사님 한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를 조용히 찾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어느 외진 곳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목사님이 찾아가서 전도사님이 이래서 되겠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런데 야단을 친 후에 그 전도사님이 얼굴을 들여다보았더니, 담배를 피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도사님은 자신이 담배를 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목사님께 고백했다. 그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자기 다리를 보여주었다. 그의 다리에는 여러 군데 담뱃불로 지진 자욱이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죄책감을 느낄 때마다, 담뱃불로 자기 다리를 지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담배를 끊지 못해 그날 저녁에도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악습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죄에게 져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데는 십자가의 고통이 따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렇게도 처절한 고통을 겪었듯이, 나의 옛 사람이 죽는 데는 처절한 고통이 따른다. 이를 감수해야 진짜 주님의 제자이다. 성경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12:4). 그러므로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우리가 완전히 죽어질 때, 우리 속에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로마서 6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은 자신이 완전히 죽은 이후에 왔다. 예수님께서 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부활이 아니다. 이는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죽어야 진짜 부활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을 때,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새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의 완전한 죽음이 우리가 날마다 연습해야 할 경건의 훈련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또 다른 능력이 있다. 죽으면 살리라. 이는 성경의 진리이다.

왜 교회의 돈을 배임, 횡령하는가? 자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가짜 학위라도 받아서 이름을 자랑하려고 하는가? 자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자격도 안 되는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가? 마음 속의 탐욕이 죽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왜 여 성도들을 추행하는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의 육신의 정욕이 아직 죽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나는 괜찮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자기 죽이기를 연습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옛 자아가 튀어나와 나를 더럽히지 않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또 다른 의미를 우리는 날마다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야 한다. 사람들이 왜 십자가 목걸이를 달고 다니는가? 단순한 장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죽음이라는 이 깊은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 십자가를 달아야 하리라. 이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달려 죽었다고!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5절 후반).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평화, 사람과 평화를 이루셨다. 십자가의 능력은 평화의 능력이다. 마음의 평화는 모든 마음의 문제 해결의 기초이다. 현대인들이 앓는 우울증, 불안함, 스트레스, 불면증,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등은 주로 마음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자살 소식을 듣는다. 최진실최진영자살했고,

몇 해전에는 카이스트 학생명이 자살했고, 잇따라 유명한 카이스트 교수도 자살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자살 소식을 듣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9년 대한민국 자살 인구가 15,413명이다.[11] 이는 2008년보다 2,555명 증가한 숫자이다.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한 꼴이다. 어제 하루도 42명이 자살했고, 오늘도 42명이 자살하고, 내일도 42명이 자살할 것이다. 이는 엄청난 숫자이다. 이는 요즘 웬만한 전쟁에서 죽는 숫자보다 많은 숫자이다. 대한민국 2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10, 40대의 사망원인 2위가 자살이다. OECD국가 중 평균 자살률의 두 배나 되고,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인 10년 연속 자살률 1위 국가이다. 다음으로 헝가리, 일본, 스위스, 프랑스 순이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자살 원인은 60-70%가 우울증으로 인해서 자살하고, 20-30%는 정신분열증 때문에 자살하고, 나머지 10% 정도는 충동적인 원인으로 자살 한다는 통계를 밝혔다.[12] 자살 원인의 단연 1위는 우울증이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연예인들이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소식을 종종 듣는다. 이렇게 자살로 몰고 가는 우울증은 왜 오는가? 20대의 자살충동을 느낀 원인 중에 취업문제가 1, 학업/성적 비관 2, 이성문제 3, 금전 문제 4로 나타났다. 취업이 안되니 고민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성적이 시원치 않으니 고민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이성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돈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음에 병이 걸린 게 아니겠는가? 대부분 마음에서 나오는 병 때문에 결국 자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잠언은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4:23). 감사한 소식은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마음의 문제해결을 약속하고 있다. 복음이 들어가면 마음의 문제도 해결된다.

백석대학교회에서 담임사역을 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학기 중 매주 수요일 저녁에 대학생들 중심으로 캠퍼스비전예배를 드린다. 매주 약1500여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있다. 어느 날 예배가 끝난 후에 학생들에게 간증을 시키고 싶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었다. 간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하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간증이 약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30여명의 학생들이 간증을 했다. 그 중에 6명이 자신이 자살을 하려고 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캠퍼스비전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마음의 치유를 받고 지금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간증을 했다. 그 중에 일부는 학교에 올 때 비신자였는데, 예배에 참석하면서 어느 순간에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고,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학교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간증했다. 그날 학생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과연 복음이 들어가면 우울증자살충동도 치유됨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복음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평안을 약속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주님은 다음 날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마음에 참 평안을 누리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이 평안을 안고,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이 주는 평안은 죽음을 초월할 평안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평안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성경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고 약속하고 있다.

여기에 복음이 주는 탁월한 평강을 경험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송가(413)를 작사한 호레이쇼 G. 스패포드 (Horatio G. Spafford)란 사람이다. 그는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였고 린드 대학교와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 및 운영위원 이었다. 1873년 이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에 시련이 닥쳤다. 시카고 화재로 집은 불타고 재산은 전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스패포드는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했다. 하지만 시카고의 대화재로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그가 출석하던 무디교회도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에 무디교회의 재정을 맡은 그는 교회당 재건 때문에 가족과 함께 갈 수 없었다. 부인과 네 명의 딸들을 먼저 여행을 가게 하고 자신은 며칠 뒤에 뒤따라가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한 여객선은 새벽 2 손님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영국선적의 철갑선 로키안과 정면 충돌해 226명의 선객을 실은 채 바다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사고 직후 스패포드 부인은 네 아이를 이끌고 갑판 위로 달려 올라와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지만 여객선은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30분도 채 못 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히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하기 직전에 실신한 채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4명의 아이들은 익사했다. 9일 후 스패포드 부인은 웨일즈의 카디프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전보를 쳤다. “혼자 구조됨.” 그는 마음의 큰 충격을 안고 있는 아내를 데리러 서둘러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런데 새벽 3시경에 그는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찼다. 그는 종이를 꺼내어 마음의 평안을 기록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413)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 1838~1876)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주며 작곡을 부탁하여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13] 스패포드는 1881 시카고에서 아주 떠나 예루살렘에 가서 한 수도원에 정착하여, 주의 사역자로 삶을 마감하였다. 스패포드가 그 환란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알 수 없다. 네 딸의 죽음 앞에서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평안이 그에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현대에는 우리의 평안을 빼앗는 것이 많다. 도박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빈털터리가 되고, 살인까지 발생한 소식을 듣는다. 2008년도 미국 뉴저지 테너플라이에서 한인 일가족 3명을 무참히 죽였던 살인자는 도박에 중독된 최강혁이란 사람이었다. 사람을 세 사람씩이나 난자해 죽이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도박장에 나타나서 도박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에 약 10만 달러 상당의 현찰과 카지노 칩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한인 여성이 도박을 해서 천만 불(100억이 넘는 돈)이나 되는 거액을 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액수면 일평생 쓰기에도 충분한 액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그는 도박장에 거의 매일 출입하면서 매일 몇 만 불씩 돈을 잃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다 잃어버렸고 나중에는 자동차 월부금도 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고 한다. 도박에 일단 깊이 빠지게 되면 빠져 나오기가 심히 어려운 마약과 같은 중독성이 있다. 마약이나 알코올은 육체적인 중독이지만, 도박은 심리적인 중독으로서 그 해악은 마약이나 알코올보다 때로는 능가한다. 심리학에서는 도박이 제공하는 강화(reinforcement)는 심리적으로 가장 벗어나기 힘든 중독성을 초래한다고 한다고 한다. 도박은 항상 따거나 잃는 것이 아니고, 불규칙하게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행동심리학에서는 이런 강화방식이 심리적으로 가장 거부하기 힘든 중독성을 낳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도박에 심리적으로 얽매이게 되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들다고 한다.

게임중독도 심각한 정신적인 중독이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엄마가 게임을 못하게 한다고 엄마를 목 졸라 죽였다. 그리고 자기도 자살했다. 게임을 못하게 한다고 어떻게 엄마를 죽일 수 있는가? 이는 마귀의 역사이다. 심각한 중독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또 어느 애기 엄마는 게임에 심각하게 중독되었다. 게임을 하던 중에 어린 아이가 자꾸 귀찮게 하니까 이번에는 엄마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도박중독, 게임중독, 우울증, 등은 심각한 마음의 병들이다. 마음이 고쳐져야 고쳐질 수 있다. 그래서 치유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의 모든 마음의 병도 고친다고 약속한다. 마음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면 해결된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신적인 문제도 해결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후반).나음이란 말은 원어로 라파라는 말인데, 이는 치료하다는 뜻이다.[14] 출애굽기 15:26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고 할 때, 이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의 치료는 애굽의 모든 질병에서의 치료를 의미한다. 물론 치료가 비유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지만 이사야 53:4와 마태복음 8:16-17의 해석을 고려하면 육신적인 치료를 배제할 수 없다.[15] 이사야 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질고라는 히브리어는 호리라는 말인데, 이는 보편적인 육신의 질병을 가리키는 단어이다.[16] 이사야 38:9에는 히스기야가 걸렸던 병에 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질병도 함께 지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은 우리의 질병을 지신 대속적인 고난이었다. 마태복음 8:16-17은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치병사역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53:4)을 성취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의 기초는 십자가의 고난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치병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3:1-10).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치병의 역사가 일어난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까지 지셨다는 믿음에 갖고 기도하면 질병이 치유되는 은혜가 임한다. 문제는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치병의 은혜를 맞보지 못한다. 병이 나면 병원부터 쫓아가고, 의사부터 찾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병원이나 약이나 의사를 주신 것도 문화명령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병을 고치는 분은 하나님이 이시라는 이 믿음은 뒷전에 두고 의사와 약만 의지하는 것은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병을 고치는 역사는 사도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다. 병을 고치는 은혜는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였다. 구약시대에도 수많은 병자들이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체험했다. 예수님 자신이 수많은 질병을 고치셨고, 사도들도 고쳤고, 지금도 치병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치병의 은혜는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질병까지 지고하신 대속적 고난 때문이다. 이를 마태복음 8장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지금도 세상 의술이 손든 수많은 병들을 치유한 간증을 듣곤 한다. 각종 암들과 불치병들이 치유되는 은혜를 체험한다.

주안장로교회를 시무했던 나겸일 목사의 간증을 텔레비전에서 들은 적이 있다. 40일 금식을 한 후에 너무 무리한 나머지 간암에 걸렸다. 병원에 갔더니, 3일만 살 수 있다고 했다. 3일째 되는 날이 주일이었는데, 의사가 사모에게30분 후면 목사님은 죽습니다.’라고 했다. 의사가 하는 말을 나 목사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다 들었다. 사모는 교회에 기도를 부탁 했고, 전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하자, 30분 후에 죽는다고 했는데, 나 목사는 죽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에 배에서 소리가 나서 변기에 배변하게 되었다. 그런데 변기에 피가 가득히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혈변을 3일간 12번 배변하고 깨끗이 낳아서 퇴원하게 되었다. 나중에 사진을 찍어보았더니, 암세포 자리만 남아있고, 암세포는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하나님께서 고치셨다. 지금은 은퇴 후에 얼마나 건강한지 텔레비전에 나온 그의 모습이 청년같이 젊어 보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치료하신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1996624일에 발간된 TIME지에서 믿음과 치유(Faith & Healing)란 기사가 실렸다. 이 글에는 현대 의술에서 믿음과 치유, 기도와 치유가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실험한 내용이 실렸다. 그간 여러 실험 결과들을 소개했다.

1995 다트모스 히치칵 의료센터(Dartmouth-Hitchcock Medical Center)의 연구 결과이다. 232병의 심장병 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조사했는데,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생존율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보다 3배가 높았다고 한다.

다른 한 연구기관에서는 고혈압 환자를 30년 동안 연구했다. 교회에 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혈압이 낮은 것을 발견했다. 평균 5mm나 낮았다고 한다. 믿는 사람들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감안해서 연구한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동맥경화와 같은 혈관질환으로 죽을 수 있는 비율이 절반 정도 낮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1996년 국가 고령연구소(National Institute on Aging)의 연구 결과이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North Carolina)4,000명의 노인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덜 우울증에 걸리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특히 하버드 의과대학의 허버트 벤슨(Herbert Benson) 박사의 연구는 유명하다. 벤슨 박사는 휴식 반응(“The Relaxation Response,” 1975)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나중에 초시간 치유(“Timeless Healing”)란 책도 저술했다. 벤슨 박사는 기도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여주기 때문에 혈압을 낮추고, 심장 박동을 늦추어 주고, 호흡기를 비롯한 다른 기관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벤슨 박사가 주장하기를 치료에 있어서 믿음은 놀라운 치료효과가 있는데, 대부분의 일반적인 질환을 60-90%까지 성공적으로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무적 무흠의 절대자(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훨씬 더 큰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그의 책에서 밝혔다.

무엇보다 1988년 샌프란시스코 제너럴 병원(San Francisco General Hospital)의 랜돌프 바어드(Randolph Byrd)라는 심장전문의의 연구결과는 놀랍다. 심장병실에 있는 393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과반수를 무작위로 뽑아서 거듭난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위약효과(placebo effect)를 없애기 위해서 환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은 그룹이 기도한 그룹에 비해서 5배의 항생제가 더 필요했고, 3배의 다른 질환을 유발한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기도 받은 사람들이 기도 받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항생제 1/5만 필요했고, 다른 병에 걸리는 비율도 1/3로 줄었다는 뜻이다. 기도의 효과가 현저한 것을 이 실험은 입증한 것이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현대 의술이 믿음과 기도가 우리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사례들이다. 그런데 현대 의술도 기도하면 병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입증하였는데, 오늘날 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말세의 때에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다. 성경은 십자가가 우리의 질병문제를 해결했다는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이사야 53:5치유 사역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말씀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언제 치병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치유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다. 병자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길 때, 치병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고치기 전에 네가 믿느냐?’라고 믿음을 확인한 이후에 치병의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영적인 문제, 마음의 문제, 육신적인 문제까지 해결했다.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가정 문제, 자녀문제, 고부간의 갈등도 다 해결할 수 있다. 어떤 중독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술 중독, 도박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 불면증, 우울증도 해결할 수 있다. 복음의 능력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죽음의 문제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생에게 원치 않는 죽음이 찾아왔다. 인생은 누구나 죽음 앞에는 두려워 떤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도 십자가가 해결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다. 그리고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3사람 살리셨다. 이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죽음까지 이길 권세가 있음을 입증한 사건들이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인간의 죽음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그 자체이다(고전 15:26).

 

복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이다.”[17] 복음 안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 기독교가 이 확실한 복음을 전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교회에 찾아오게 될 것이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눈이 빠진 삼손과 같은 복음을 전했기에 비신자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로마서 1:16-17에 기초해서 복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전인적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전인적 구원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는 인간의 영적 구원, 정신적 구원, 육신적 구원을 포함한 총체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누가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믿는 자들이다.

 

 

 

 

 

 



[1] 이 설문조사의 통계는 김성곤 목사의 두 날개 컨퍼런스에서 들은 것인데, 그의 복음에 대한 통찰은 복음의 총체적인 능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2] 김진규,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생명의 개념," 「개혁논총」 제20 (2011): 105-128.

[3]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Chapters 1 to 18 (Grand Rapids: Eerdmans, 1970), 387-92.

[4] Young, 윗글, 1-21.

[5]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이들의 잘못된 메시아완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군주로서의 메시아완, 선지자로서의 메시아관은 갖고 있었지만 이사야 53장에 계시하고 있는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관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이사야 6장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눈이 감길 것을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소수의 남은 자들이 복음을 깨닫고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

[6] 리 스트로벨, 『예수는 역사다』 (윤관희, 박중렬 옮김; 서울: 두란노, 2002), 251-69.

[7] 페솨는 주로 반역죄에 사용되는 단어인데, 53:5, 8, 12를 비롯해서 선지서에서는 주로 여호와께 대한 반역죄에 사용되었다. 페솨의 죄는 유일하게 대속죄일에 용서받았다. Eugene Carpenter and Michael A. Grisanti, “[v'P,,” NIDOTTE 3:708-709.

[8] Alex Luc, “@/w[;,” NIDOTTE 3:351.

[9] Franz Delitzsch, Biblical Commentary on the Prophecies of Isaiah (trans. James Martin; 2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54), 2:320.

[10] 속죄제나 속건제 등 죄를 속하는 제사는 제사장, 회중, 평민 등 신분이나 빈부에 따라 드리는 제물이 달라고 제물의 피를 뿌리는 곳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위의 예는 평민을 위한 일반적인 속죄제의 실례를 든 것이다( 4-6).

[11] 통계청 보도자료, “2009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2010. 9. 9.에 배포). 온라인: http://kostat.go.kr.

[12] 온라인: http://donga.kormedi.com/health/news/New_View.aspx?artId=1188234.

[13] 온라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bcmission&logNo=50169499664.

[14]ap;r;,” BDB 950.

[15] 김진규, "이사야 53:4-5은 치병을 위한 대속을 포함하는가?," 「백석신학저널」 제22 (2012): 34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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